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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모시

아름다운 우리의 혼 한산모시가 천년의 역사에서 깨어납니다.

박미옥

박미옥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
박미옥
  • 1959년 출생
  • 2001년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세모시짜기 전수교육조교 선정
  • 2018년 6월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세모시짜기 보유자 인정
수상경력
  • 2000년 제11회 모시문화제 장려상
  • 2001년 제12회 모시문화제 장려상
  • 2005년 제16회 모시문화제 공예품경진대회 입선
  • 2008년 제33회 전승공예대전 특선
  • 2016년 제39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 2017년 제28회 모시문화제 전통공예품공모전 동상
  • 2017년 제42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장려상
전시회 경력
  • 2016년 8월 31일~2017년 1월 30일 국립현대미술관 <공예공방ㅣ공예가 되기까지>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세모시짜기 보유자 박미옥

보유자는 故나상덕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세모시짜기 기능보유자)의 딸로 어머니를 통해 모시짜기를 배우고 대를 이어 모시를 짜고 있다.
2001년 전수조교로 지정되어 세모시짜는 기술을 보유하면서 현재 한산모시의 활성화를 위하여 서천군청이 운영하는 한산모시관의 모시스쿨에서 모시짜기 기술을 가르치며 전통공방에서 작업과정을 시연하고 있다.
보유자는 11회, 12회 모시문화제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고 제16회 모시문화제 공예품 경진대회에 입상 하였으며, 제3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 제39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 제42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하였으며, 2016년8월31일부터 2017년 1월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공예공방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2001년 전수조교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6월 11일 기능보유자 인정서를 받아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세모시짜기 기능보유자가되었다.


보유자는 충남 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세모시짜기 기능보유자였던 故나상덕 선생님의 5남매중 맏딸로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시짜기를 보고 배우며 자랐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었으나 눈썰미가 좋아 어머니가 작업하는 모습을 눈으로 익혀서 어머니가 모시를 짜다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몰래 베틀에 앉아 모시를 짜다가 줄이 끊어지면 내려오고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모시를 짰다.
보유자는 밤낮으로 모시를 짜고 살림을 꾸려가는 어머니를 도와 어릴 때부터 모시를 매거나 나는 일을 도왔고, 어머니의 힘을 덜어주는것에 뿌듯함과 기쁨을 느꼈다. 터득이 빠르고 손 또한 야무지다는 것을 안 어머니는 보유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모시를 매줄테니 한번 짜보겠냐고 물었고, 보유자는 이에 응해 모시를 짜보았는데, 6일만에 한필을 완성하였다.
딸이 처음 짠 모시를 들고 시장에 가 내놓았는데, 매우 잘 짠 모시라고 칭찬을 받았고, 이에 어머니가 보유자에게 모시를 가르치게 된다. 이에 본격적인 모시인생이 시작되며 보유자의 어머니는 자신이 다 해줄테니 한번 해보라고 지원해주게 되는데, 이때 보유자는 6일에 모시를 두필씩 짜게 된다. 보유자는 모시를 짜고 보유자의 어머니는 시장에 가 모시를 팔았는데, 모시를 들고갈 때마다 상인들은 모시를 예쁘게 잘 짰다며 보자마자 사가곤 했다. 어머니를 도와 모시를 매고 날고 짜는등의 일을 해왔지만, 모시는 더 이상의 비전이 없으니 서울에서 기술을 배우라는 당고모님의 제안으로 미싱자수 공장을 운영하던 당고모에게 미싱자수를 배워 미싱자수 기술자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딸과 모시를 짜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위해 시골에 내려오게 되었고 서울에서는 전문기술자를 뺏기게 됐다며 매일 연락이 왔으나 어머니의 병환을 핑계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어머니가 사윗감으로 보아둔 우체국에 근무하던 청년과 결혼하며 모시인의 길로 정착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모시짜는 일을 물려주고 싶어 했지만, 며느리들은 다 외지에 나가 있었고 딸이 가까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계자가 되었고, 이 정착이 43년 모시인생의 시작이 된 것이다.


시집갈 때 챙겨간 베틀을 가지고 모시를 짜며 어머니와 만드는 새로운 모시짜기 인생이 시작 되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닌 내가 원했던 모시인의 길이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보유자는 모시를 처음 짜게 되면서 부터 가는모시에 도전했는데, 12살에는 보유자의 어머니로부터 ‘니가 나보다 더 잘짠다‘ 라는 말을 들었고 주변에서도 역시 엄마손을 닮아 잘한다고 칭찬받기 일수였다.
보유자와 어머니는 함께 작업하며 모녀의 정이 더 두터워졌다. 어머니가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모시를 매는 일에 힘겨워하시자 보유자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모시를 날고 매며 어머니가 모시를 짜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릴적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보유자 본인도 어머니를 도와준 것이다.
어머니의 모시공방에 함께 출근하며 모시작업을 했고,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서로를 지지해준 결과 모녀의 정이 더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릴때부터 모시일을 한 결과 허리에 병을 얻게되어 허리수술을 2번 하게 된다.
날이 추우면 허리가 더 아파 모시에 집중할 수 없었던 보유자는 이 때가 기회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여 한번의 겨울에 하나씩의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처음의 도전으로 운전면허시험을 보게 되고, 미용사자격증, 요리사자격증의 순으로 취득하게 된다.
어느날부터 보유자는 학교에 지각하는 꿈을 계속 꾸게 되었는데, 이 꿈이 어릴 때 배우지 못했던 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많이 가르치지 못한 미안함을 갖고있는 어머니의 마음과, 더 많은 배움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낮에는 모시를 짜고 밤에는 인근 군산에 있는 야학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넘어져 다리에 깁스를 하고도 공부를 하러 다녔고, 밤 11시를 넘겨 집에 들어와서도 예습복습을 하며 노력한 결과 고입 검정고시와 대입자격 검정고시를 차례로 패스하는 쾌거를 이뤄 어머니의 미안함과 배움의 한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보유자는 한번의 시도에 바로 합격해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을 받았고,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며 감사해했다.
딸의 합격에 어머니는 상급 학교로의 진학을 권했으나 보유자는 모시짜는 기능을 더 연마하며 발전시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어 모시짜기에 더욱 매진하였다.
어릴때부터 모시를 가까이 하였기 때문에 보유자는 남들보다 모시를 더 쉽게 다룰 수 있었고, 그렇기에 각종 기능대회에서 여러번 수상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2001년에 전수조교로 지정된 후 제11, 12회 모시문화제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고 제16회 모시문화제 공예품 경진대회에 입상 하였으며, 제3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 제39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 제42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또, 2016년8월31일부터 2017년 1월 30일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 공예공방에서 <공예공방┃공예가 되기까지>라는 주제의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여러 대회와 전시회를 거치며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이 생기려 할 즈음 남편의 권유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하나의 큰 산을 넘으니 또 하나의 큰 산이 보였고, 그 산을 정복하고싶다는 마음이 커질때였다. 또 미래를 더욱 탄탄히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남편의 제안에 바로 응할 수 있었다.
낮에는 서로의 일에 충실하다가 밤에는 부부가 만나 함께 공부하며 부부간의 정도 더 탄탄해졌다. 함께 노력하고 고생 한 결과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고, 남편은 우체국에서 퇴직한 후 요양원에서 근무하며 제2의 인생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보유자 본인도 자신이 힘에 부쳐 더 이상 모시를 못 짜게 되더라도 보육교사 자격을 활용 어린아이들에게 모시를 가르칠 수 있어 안심할 수 있었다.
보유자는 2018년 6월 11일 기능보유자 인정서를 받아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세모시짜기 기능보유자가되었다.